할당제는 과연 철폐될 수 있을까 論說


日本 臺灣 그리고韓國 論說

日本은 共産黨을 許容하고 있고

臺灣은 국가규모가 70배인 中共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思想版圖가 한국 비슷했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러나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傳統的인 文化背景(漢字使用縱書)을 維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大韓民國 건국초기까지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右派를 自處하며 이 땅의 西洋化 및 傳統文化否定勢力이 得勢하여 한국의 文化背景은 左派의 趣向으로 變更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혼란이 계속됨은 필연적이다.

앞으로 右派의 勝利를 해서는 右派內 傳統無根勢力을 抑制해야 한다


[新作中篇] 사라진 民族 (下) 소설소개

관광단은 아직 안 돌아왔다. 방에서 배산은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라는 책을 펼쳐보았다.

1980년대에 이문열은 자기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상당히 고뇌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배산이 이제까지 파악하고 있는 아이디 은하천사의 주장과 매우 공통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자주 이문열의 집을 방문했던 것이니 둘이서 어떤 공감이 있었는지 매우 궁금했다.

소설의 서두는 장려했느니, 우리 그 낙일이라는 소제목이 달리고 화자(話者)로서의 이문열의 주장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치욕 속에 묻으려 하는 못된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 못된 세력은 우리 중에 섞여 살고 생김도 차림도 비슷하나 피는 우리와 조금씩 달리하는 되()트기, ()트기, 한자(韓子:왜트기) 들을 이른다. 이네들은 어쩌다 제 핏줄에 튀긴 이족(異族)의 피가 무슨 요사라도 부리는지 좋을 때는 우리 중의 하나로 가만히 있다가도 정작 긴요한 대목에 오면 갑자기 한겨레 아닌 딴 겨레가 되고 만다.

 

이 대목은 2008년 배산과 교류한 그의 주장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소설은 자칫 실제의 혼혈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인종차별에 민감한 현대사회에서 그대로 이슈로 펼치기에는 곤란한 면이 있지만 그의 주장은 혈통을 넘어 윤회와 인연의 연결을 말했던 것이었다.

여진족과 토착왜구는 신라와 고려로 이어온 한반도국가의 주변지역에 거주하다가 조선 세종 때에 나라가 융성하자 많이 귀화하였지요. 하지만 한문을 주로 사용하는 이 나라의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여 하층민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이십세기 들어 한국 땅이 외세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통민족이 주권을 잃자 과거 비주류였던 이네들의 세력이 자라났지요.” 그의 주장이었다.

중국도 宋元明淸으로 바뀌면서 한족 몽고족 한족 만주족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민족이 변화해왔었죠.” 배산은 그와의 교류가 진행되어 그를 더 이해하게 된 뒤에는 동조해주었다. 역사적으로 중화문명을 공유한 한국이 정체성을 회복하여 함께 발전하는 것이 좋겠다는 동지의식도 있었다.

그렇죠. 비록 한족이 문화민족이었지만 통치계층의 좋지 않은 업보가 쌓임으로 인해 몰락하고 나라 안과 주변에서 이제까지 무지한 하층계급으로 있었던 소수민족이 발흥하여 권력을 얻곤 했지요. 업보순환의 원리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러면 지금 한국도 중국역사와 같이 국가 내 민족세력 간의 권력교대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네요.”

그런데 여진족과 토착왜구 후예세력들은 대한민국을 각기 저네들의 연고지역에 가깝게 대륙에 붙이느냐 혹은 해양에 붙이느냐로 싸우는 것이죠. 만약 상대편 쪽이 원하는 대로 이 나라가 가까워지면 자기 쪽은 세력이 위축될 것이니 이들 간에는 어떠한 타협도 불가능해요. 백년전 한국이 전쟁터가 되었던 청일전쟁의 양상이 재현된 것이지요.”

그 때 그의 주장에 이문열 소설의 권위를 빌리면 한결 설득력이 있었을 것인데 당시 그는 이문열과 교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을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소설에서의 되()트기 왜()트기 양()트기가 각각 그가 말하는 여진족 토착왜구 서양세력을 풍자한 것이라고 평론을 발표하면 자신의 주장이 일개 소외된 논객의 기의(奇議)가 아니었음을 입증할 수 있었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한국민족의 쇠락도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는 혼자 외롭게 주장하다 이윽고 묻혀갔을 것이었다.

이문열의 소설은 그 다음 ‘25년 전쟁사라는 단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마지막 황제의 분사(憤死)후 한국민족 지도세력은 광복군이 되어 남로군은 이어도 북로군은 장백산으로 분산 주둔한다.

북로군은 만주에서 일본군을 혼란에 빠트리고 전투하여 큰 타격을 주었는데 청산리 싸움이라 불렸다.

남로군은 거북선 두 척을 포함한 소규모 해군력으로 이순신장군의 전술대로 일본해군을 다도해로 유인하여 궤멸하고 승리한다.

일본이 중국과 전쟁하자 북로군과 남로군은 본토에 진공하여 지리산과 청천강에서 일본군을 격파해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되찾았다. 일본군이 서울의 민간인을 인질로 삼으니 포위만하고 대치하던 중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나라를 되찾았다.

 

이렇게 한국이 자력으로 독립한 것임을 주장한 소설은 세 번째로 장군과 박사라는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소설에서는 현실사회 한국의 정황을 어떤 뜬소문으로 돌리고는 일본이 패망한 다음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게 아니라 일본이 동서로 나뉘었는데 서쪽은 소련을 등에 업은 장군 동쪽은 미국을 업은 박사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소설 속 일본의 정세는 현실한국의 풍자였다. 소설에서는 한국 즉 우리가 행복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를

만약 우리 임금님께서 자신을 베어가며 새로운 충성의 구심점을 마련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갑작스런 권위의 부재로 큰 혼란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흐지부지 사라져버린 옛 권위에 대한 실망은 전통 속에서 어떤 원칙과 방향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았을 것이고 맹목적일 만큼 어떤 새로운 것에서 그것들을 찾게 만들었을 것이다.

 

했는데 소설에서 일어났을까 염려했던 그것은 바로 한국의 현실에서 일어났던 것이었다.

나라의 중심권위가 사라지면 변방세력이 힘을 얻을 것이다. 변방세력인 여진족과 토착왜구는 기회삼아 더욱 전통의 권위를 없애고자 마침 태평양전쟁 승전국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서양세력의 힘을 빌린 것이다.

조선멸망으로 전통적 지도층이 몰락하고 세월의 흐름에 따른 업보순환도 있기에 여진족과 토착왜구의 후예는 한국사회의 영향력 있는 계층에 다수 포진해 있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세력이 집권하든 토착왜구세력이 집권하든 정부정책은 이 나라의 영어문화권화를 추진했고 기업들은 명칭을 영문약자로 바꾸기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소설에서 일본의 관서지방을 장악한 금촌(金村)이란 자는 불세출의 영웅이며 애국자며 장군이며 이념가라 자처하며 집권했다고 한다. 그의 반제유격활동부터가 생판 거짓말이고 그의 사회주의 사상 역시 소련군의 정훈 교육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인민의 열렬한 환호도 소련군이 끌어낸 군중을 과장했다고 한다. 바로 현실한국의 북측 김일성을 비유한 것이었다.

관동지방에 나타난 목자(木子)는 일왕가의 혈통으로 애국자이며 구국의 화신으로 자처했다고 한다. 그러나 목자박사가 망명정부에 개입한 건 사실이나 재미교포들의 성금을 유용했다가 해임됐다고 한다. 무슨 작은 일만 있으면 미국무성에 항의 요구 경고 충고 등의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바로 현실한국의 남측 이승만을 비유한 것이었다.

이것은 현실에서 한반도의 해방 후 남북의 두 건국지도자가 실상 남북의 백성이 잘못알고 있는 만큼 그렇게 위대한 인물들이 아니며 왜트기세력대표와 되트기세력대표가 각각에 해당하는 서양세력을 업어 집권했을 뿐이란 것이었다. 토착왜구세력과 여진족세력은 한반도를 저네들이 우세한 지역대로 반으로 자르면 그 지역에서는 전통의 민족세력보다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있어 분단을 찬성했던 것이다. 물론 각 세력이 분명히 나뉜 것은 아니기에 이후 남쪽에서는 여진족세력이 다시 일어났다.

소설에서는 한반도에도 장군과 박사가 왔다는 중복된 서술을 하며 그들의 이름을 밝혀서 일본의 금촌과 목자도 상상이 아닌 실존인물을 풍자했음을 분명히 했다. 다만 한반도에는 그들이 왔다가 쫓겨 간 것이었다.

 

평양의 소련군사절단의 장군은 김일성이란 우리식 성명에 모양도 우리와 비슷했다고 하나 염통에 작은 용이 없어 우리 겨레는 아니라는 정설이다.

남쪽의 박사는 이승만이라는 우리 식 이름을 쓰고 모습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지만 말이나 행동은 미국식이고 눈알 푸른 아내 등 우리와 다르다.

장군은 되트기 박사는 왜트기와 양트기를 졸개로 얻어 평양과 서울에서 난리를 시작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새로운 신파 배우쯤으로 알고 감탄하니 장군과 박사에게는 신나는 세월이었다. 그들이 우리역사를 뒤집고 선동하는 것을 재담쯤으로 알았다. 이윽고 우스갯소리가 아님을 알자 장군과 박사는 추방되었다.

그때 우리가 겨레의 뜨거운 정과 슬기로 그 두 사람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일본처럼 체제를 달리하는 두 나라로 분단되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역사의 고비를 훌륭히 넘겼다.

 

이렇게 이문열은 우리민족의 편이 아닌 장군과 박사를 거부하여 행복하게 된 가상의 우리역사를 소설로 발표하여 실제로 장군과 박사를 집권하게 만든 현실한국의 불행을 극복하자고 주장했던 것이었다. 해방 후 현실의 한국민족은 장군과 박사가 분할집권 하도록 허용하였으며 그렇게 북쪽 오랑캐편향세력과 남쪽 왜구편향세력이 득세하자 정통적 한국민족의 주권은 약화되어갔다.

배산은 오래전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2007년 가을 배산은 상주(常州)의 국립공업기술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대학이라기보다 기술학교이면서 무기 우주개발 등 국가적인 기밀기술개발을 지원하는 학교였다. 그만큼 입학생들에게 강한 애국심과 공산당을 향한 충성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배산이 입학했을 때 지역 공산당으로부터 지시가 있었다. 입학생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여학생만을 따로 불러서 모았는데 모든 여학생은 아니었다. 외모가 지나치게 수수한 학생, 장애인 티가 나는 학생, 사회생활을 하다 입학하여 나이가 너무 많은 학생 등은 제외하고서였다.

입학을 축하하오. 우리의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자 그대와 같은 여성동지들에게 권할 사업이 있소.”

강당에 삼백명 가량의 여학생들만을 앉히고 강소성공산당서기(江蘇省共産黨書記)가 단상에 정렬한 간부들의 엄숙한 배례를 받으며 나타났다.

당서기는 분위기가 너무 경직하다 여겨졌는지 웃음을 짓고 나서

입학생 대표 올라와 보시오.”

했다. 입학생 중 여성수석합격자가 교직원의 지적을 받고 단상에 올라왔다. 당서기는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대들은 국가를 위하여 선발된 엘리트로서 이제부터 국가를 위하여 통신망공작을 시작하면 좋겠는데 할 수 있겠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희로서는 당의 기대에 따르려면 우선 배워야 한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배워서 기여할 일은 천천히 하면 되는 것이고. 그대들은 비록 아직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 그자체로서는 최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소. 그대들의 현재 가진 재산을 국가를 위하여 사용할 길이 있소.”

이 정도에서는 학생들도 당서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강 짐작할만했다. 개중에는 무슨 기쁨조같은 역할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당혹해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 걱정을 하는 학생더러 다른 학생은 걱정마라 수군대기도 했다.

. 우리가 무슨 미모로 선발된 것도 아닌데 너무 앞서 생각하지마.”

왜 그래도 그런 거 하기 어려운 동학(同學)애들은 많이 빠졌잖아.”

걔들 일부 빠지고 남은 우리들이래야 뭐 평범한 수준이지.”

다시 당서기의 발언이 이어지자 학생들은 조용해졌다.

한국 등 우리의 공략대상인 이웃나라들에는 많은 남자들이 정신적 위안을 받으려고 인터넷 채팅을 통해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여자와 교제하다 잘못되어 고소를 받으면 큰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아 요즘 한국남성들 특히 나이가 중년이상 되는 남성들은 외국의 여자를 선호합니다. 인터넷에서 영어와 한문을 사용하여 한국남성을 사귀시오. 한국의 정보를 많이 가진 지식인 같으면 더욱 잘 사귀어 두시오. 그리하여 당신들과 같은 청순한 여대생이 그 남자를 좋아하는 듯 보여주면 그 남자는 감동하여 당신들에게 마음을 의탁할 것이오. 그러면 당신들은 그들에게 점진적인 요구를 하여 우리의 국익에 맞게 그들이 행동하도록 유도하여주시오.”

인터넷 채팅은 특별한 지시가 아니라도 다들 하고 있는 것이니 그리 부담을 주는 요구가 아니었다. 여학생들은 끄덕이고 오리엔테이션의 날을 마쳤다.

국제망정보수집(國際網情報蒐集)의 활동은 특활과목으로 배당되었다. 여학생은 인터넷 일선에서 세계의 지식인남성들을 찾아 대화하고 남학생은 정보를 분석하거나 후방지원을 해주면서 역할을 해나갔다.

국제망정보수집의 총책은 학생의 수준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지만 각 대상국가의 분회는 학생들의 수준에서 총합하고 있었다. 배산은 한국분회에서 활동했다.

해가 바뀌어 첫 겨울방학 때에 정보수집 발표회가 있었다. 배산을 포함해서 열 명 가량의 학생이 교내의 학생서클룸에 모였다.

여학생들은 국제망을 통해 한국의 남성지식인과 교신하여 관련정보를 수집한 결과를 발표했다. 한사람과 깊이 교신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피상적인 대화만 나눈 여학생들이 많았고 한사람과 깊이 대화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여학생은 배산 포함하여 세 명이었다.

난 한국의 기업인과 대화해봤어요.”

채효단(蔡晓丹)이라는 친구가 먼저 발표했다.

나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질문해봤어요. 그러니 상대의 답은 이런 것이었어요.”

효단은 접선한 한국인과의 대화를 발표했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그렇다고 능력별로 공정하게 사람을 대우하는 것도 아니고 금수저집안의 상속자만 살아가기 좋은 형편이라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진려민(陈丽敏)이라는 친구의 차례였다.

난 한국의 정치인과 대화했어.”

려민은 접선한 한국인과의 대화를 발표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말이 민주주의이지 사실은 기득권층이 저들 뜻대로 나라를 주무르고 있으며 정치입문도 정치인 집안의 아들며느리나 가능한 것이라는 불평이었다.

배산도 자기가 접선한 한국인 소설가와의 대화를 발표했다.

이 사람들의 한국 내 사회적 위치 그리고 이들의 발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 등이 의문시 되었다.

분석을 맡은 남학생 곽건위(郭健伟)가 나섰다.

둘은 아니야. 기업인은 소규모 영세업자일 뿐이야. 정치인은 인터넷을 애써 찾으면 겨우 정당인으로 검색되는 정치지망생 아니 정치낭인에 불과한 사람이야. 하기야 정말로 잘해나가는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우리 같은 외국학생하고 인터넷채팅이나 할리가 없지.”

효단과 려민이 상대한 한국인은 사업과 정치에 희망만 있다뿐이지 백수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배산의 접선자에 관해서는 곽건위를 비롯한 분석담당 학생들이 주목했다. 크게 이름난 자가 아님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소설가로서 이름을 팔기 때문에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고 생각도 중국에 우호적이었다.

상당한 잠재성이 있어. 이 사람을 우리나라 편으로 잘 포섭하여 유명인사로 만들면 우리 국익에 보탬이 될 거야.”

한국분회의 학생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배산과 한국인 작가의 인터넷 대화는 거듭되고 봄이 되어 배산은 그와 상주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그러자 배산의 통화를 모니터링하고 있는 당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통지했다.

섣불리 만나지 말라. 그러다 너의 마음이 진심으로 그에게 함몰되는 날에는 너는 그쪽나라의 편을 들게 될 수가 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다른 나라에 있을 때 여인이 남자의 나라의 편을 드는 사태는 동서(東西)의 옛 이야기에 있으니 고구려와 낙랑에서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그것이요 잉글란드와 아일란드에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이미 약속은 했는데 어쩌지요? 오지 말라고 할까요?”

그와의 접선은 유효하다고 판단되었으니 교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입국은 하게하라. 그가 중국에 들어온다면 지침을 내려줄 것이다.”

약속한 날 그가 상주에 와있다고 전화가 왔다. 배산은 모레 남경(南京)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동안 그는 중국지역을 여행하기로 했다.

다음다음날 오후 남경에서 전화가 왔다. 그러나 배산은 전화가 늦어서 이미 다른 일을 보러 떠났다며 다음에 만나자고 했다. 그는 좋아하는 여인이 있는 곳 가까이 왔고 현지의 공중전화로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큰 불만을 표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후로도 공산당 청년위원회에서는 배산의 그와의 만남 스케줄을 관리하고 섣불리 진행되면 만류하곤 했다. 이런 중에 배산은 학교를 졸업했다.

배산의 홈페이지에는 다른 남성친구들이 대화하는 것이 댓글로 달려있었다. 어떤 이는 상당히 친한 듯 보였다. 이것을 본 한국의 그는 댓글로 포기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배산의 동료들이 나섰다.

배산은 졸업 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좀 기다려 봐야 될 거예요.”

이렇게 하여 그는 다시 배산과의 만남을 기다렸다.

배산도 너무 오래 그를 기다리게 한 것 같았다. 이제는 국가정보원의 직원이니 한국 실태조사를 위해 출장을 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한국의 작가를 만나러 한국에 가볼까요.”

계획을 세워 제출하자 상사(上司)

한국인과 공작중인 요원은 한국에 출국하지 말 것.”

하고 결재를 거절했다. 물론 신참 정보요원이 휴가를 내서 개인적으로 허락 없이 출국한다는 것도 안 될 말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출장 온 것도 훗날 중견간부가 된 이후였다.)

배산은 출국을 제한받으니 다시 그에게 상주에 오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산은 정보국요원이니 기관단지 내에 거주하고 있고 주소는 비밀이었다.

상주에 와서 나를 찾아요.”

배산은 그에게 통보했다. 단지 며칠 왔다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곳 상주에 정착시켜야 한다.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자기가 그 주소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인터넷대화방으로 부동산업자를 그에게 연결해서 그가 상주에 오면 방을 알아봐 주겠다고도 전했다.

배산은 이러한 요구가 무리임을 짐작했다.

먼저 그 사람과 만나서 약속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다시 상사에게 건의 했는데

그 사람이 한국에 생활기반이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당신이 그 사람을 따라 한국으로 나갈 위험이 있어.”

당의 방침이라며 여전히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배산은 입장이 난처하여 그와 통신상의 직접대화를 하지 않았다. 타인을 통해 의사전달도 했다.

당신이 진정 허배산양을 사랑한다면 먼저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으세요. 당신의 여동생이 몇 달에 한 번씩 나타나 며칠 왔다 사라지는 외국인과 결혼하겠다면 당신은 허락하겠나요.”

이에 대해 그도 답했다.

내가 중국에 가서 머물러 있으려면 중국은 이민을 받아주지 않으니 비자연장을 편법으로 하는 방법이 있는데 돈이 많이 드니 나는 불가능해요. 그 외에 중국에서 살기 위한 방법은 있지요. 아줌마나 누구든 조건에 상관없이 결혼하여 중국에 정착할 수는 있는데 그러면 배산과는 어찌한단 말인가요. 배산을 먼저 만나 상의하는 길 밖에는 없어요.”

그의 형편으로 중국에 상당기간 머무르는 비용을 마련하려면 한국에 있는 자기의 작은 부동산까지 처분해야 가능한 것이지 평소의 비용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한국의 생활기반을 청산하고 몸을 던져 중국에 오라는 것인데 사실상 거절한 것이었다. 그는 끝내 자기의 조국에 미련이 있었던 것이었다.

수개월마다 중국에 왔다가곤 했던 그는 이윽고 발길을 끊었다. 배산도 스스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둘 사이는 멀어졌다.

그런 중에 한국의 민족정신은 교체되어 가고 있었다. 그 변화의 주도세력은 이것을 세대차이로 포장하니 한국인들은 저네들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나 세대갈등으로 정도로만 여기고 지나갔다.

그가 다시 이문열과 교류한 흔적이 이동경로 기록에 남아있지만 늙어가는 서로의 나이와 함께 어떤 지사적 의지보다는 시대의 변화를 체념할 뿐이었을 것이다.

점차 몰락해가는 한국의 문학에 따라 그는 이문열과 함께 순장되었을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문인으로서의 위상을 가졌던 이문열이 문학의 퇴조와 함께 잊어지는 중에 그 아래 흔적도 없이 묻힘은 당연했다.

그의 주장이 이문열의 작품을 업어 발표되었더라면 한국사회에 더 심각히 받아들여졌을 것이었으나 시대가 기회를 맞춰주지 않았다.

그가 힘을 빌렸어야 할 큰 힘이 또한 있었다. 그가 그리도 한국인에게 이해시키고 싶었던 것은 이미 제도권 학문에서 언급된 바 있었다.

일찍이 게르만의 사상가 헤겔은 민족정신은 보편적 원리를 간직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세계사적이라고 하였으니 몰락하는 민족은 정신이 인류보편의 최고개념을 파악하지 못한 민족이고 최고개념을 파악한 민족만이 세계사의 지배적인 민족으로 남는 것이다.

에스케이는 케이팝과 응용기술에 여전히 세계의 상위권이다. 그러나 이곳의 민족에는 지성이 간직하는 인류보편의 최고개념이 없다. 세계사에 있을 나라는 아니고 다만 변방 소수민족의 특색 있는 지역은 될 것이다.

배산은 국가정보국에 에스케이나라의 병합을 정식으로 건의하기로 했다.


[新作中篇] 사라진 民族 (上) 소설소개

2066. 유라시아 극동 한반도에 이제 대한민국은 없다. 이곳 사람들은 유연한 발음으로 저네 나라를 에스케이(사우스코리아)라고 한다. 에스케이라고 해도 자기나라를 지칭함은 다들 알 수 있고 외국인들도 알아듣는데 굳이 달리 부를 필요가 없다.

인천공항이라고 불렸던 아이씨에어포트에 중국에서 온 노인 단체관광객이 입국절차를 밟았다. 삼십명 가량의 그들은 부부 혹은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담소하며 걸어들어 왔다.

그들 중 한 노파가 두드러졌다. 출입국사무소에서 보인 신분증에 따르면 노파의 이름은 허배산(許配珊) 지역은 강소성(江蘇省) 나이는 2066년에서 출생년도 1990을 빼면 76세였다. 모자를 더한 은회색 양장이 젊은 여성처럼 정갈해 보이고 얼굴은 잘생긴 남자를 방불하는 준려(俊麗)한 윤곽이었다. 간혹 오는 길에 알게 된 여행동료와 간단한 말은 주고받아도 이내 돌아서서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꼿꼿이 혼자 걷는 것이었다.

그들을 안내하는 여행사 직원이 일행 모두를 버스에 오르도록 했다. 허배산 노파도 자리에 앉았다. 버스정원보다 인원이 적어서 뒤쪽 자리로 가서 혼자 창가에 앉을 수 있었다.

배산은 바깥의 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번길이 초행은 아닌 듯 담담하면서도 감회가 어린 듯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여행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오늘은 일단 서울을 둘러보고 저녁에 숙소에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는 우리와 가깝지만 영국 미국 인도 필리핀 그리고 아프리카 일부국가들과 함께 영어문화권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에스케이는 영어문화권의 핵심국가로서 영미(英美)와 함께 팝송문화를 주도하며 우리나라와 일본이 따라오지 못하는 세계적인 대중문화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스스로는 에스케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아직도 한국이라고 오래전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에스케이의 외교부에서는 불만을 표시하고 호칭을 바꿔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공식적으로는 에스케이로 부르기로 했지만 오랫동안의 버릇 때문에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이곳은 배산으로서도 젊을 때부터 관심을 두고 관련활동을 해온 이웃나라이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다. 지금의 중국 젊은이들은 영미권의 팝송을 들으며 가수의 국적을 살피는 경우 말고는 바로 옆의 이 나라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젊은 안내원도 상당히 생소한 나라를 소개하듯 하는 것이었다.

수년전까지도 국가정보국(國家情報局)의 공무원이었던 배산은 업무로 가끔 방문하면서 이 나라의 풍물이 급격히 변화하는 것을 보아 왔지만 그 때마다 며칠 만에 귀국해야 했기에 이 나라의 현장조사는 그리 깊이 한 적이 없었다. 사실 이웃나라의 사정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정보국요원으로서 자기나라의 당면과제가 중요했기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은퇴자로서 소일거리를 찾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에스케이나라로의 방문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 생각을 한 계기는 오래 전 2008년 이 나라의 사람과 인터넷통신망에서 대화한 기억이 근래 새삼스레 떠올랐던 때문이었다.

대학초년의 겨울방학에 배산은 인터넷 국제대화방을 사용하다가 한국의 한 중년남자에 대화를 걸었다. 한창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강할 즈음에 바다건너 이웃나라의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궁금했고 마침 문인으로 보이는 그의 글에 끌리게 되었다.

당신의 시()는 한자가 있어서 대강의 뜻을 알아볼 수 있었어요.”

배산의 말에 그 남자는 놀라운 듯 감탄사를 보내며 반가워했다.

사실 한국의 다른 문인들은 국가정책상 거의 지금 한자를 사용하지 않죠.” 그는 자기의 경우가 특별하다는 것을 고백했다.

왜 그런가요. 한국은 이천년 넘게 한문을 사용했던 나라가 아닌가요. 문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항의하지는 않나요.”

날 때부터 묶여 자란 개는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하죠. 한국은 문인등단 때부터 한글만 사용하도록 훈련시키니까 그렇게 자란 문인들은 불편할 것이 없어요.”

한글은 한국만의 문자이니까 한국을 나타내기 위해서 정부가 그렇게 강제하는 것인가 보네요.”

이웃과 다름이 나라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않죠. 중국에도 한자를 쓰지 않는 소수민족들이 있잖아요. 민족의 독립은 인류최상의 문명을 함께하는 것에 달려있지 민족문화의 개성이 아닌데 이것을 사람들한테 이해(理解)시키기가 어려워요. 한글은 조선시대에 학문을 배우지 않는 하류층을 위한 글자였지요. 지식층은 보조적으로 사용했을 뿐 주된 지식교환수단은 한자였지요. 중국에서 송나라가 망하고 몽고족이 발흥하여 중국을 지배했듯이 한국에서 근세조선이 망하고 일제를 거쳐 계층이 뒤집어지니까 한자를 사용 않던 족속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요. 중국원나라시절 몽고문자가 궁중의 문자였듯이 이제 한국에서는 한글이 공식문자이지요.”

한국은 단일민족국가 아닌가요.”

중국에도 한()나라의 백성이었던 한족과 그 이후 합류한 여러 소수민족이 있듯이 한국도 신라와 고려에서 한자문화를 이어온 정통의 한반도민족과 근세조선 들어 합류한 여진족 토착왜구 등의 소수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죠.”

한국은 중국의 한 성()만한데 왜 대한(大韓)이라고 허세를 부리냐는 친구들이 많던데요.”

중화문명의 법통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천자(天子)의 나라만이 한 글자의 국명을 쓸 수 있었지요. 그러나 청()의 쇠약이후 설립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은 한 글자 이름의 국명(國名)으로서 이를 계승한 대한민국은 정통 천자의 나라의 맥을 잇지요.”

그는 배산에게 같은 중화문화권의 후예로서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은 지금 야만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중국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고 지금도 서양세력과 서양사상의 영향으로 전통문화의 훼손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이제 한중(韓中)의 문화민족은 협력하여 서로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후에 배산이 국가정보국 요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문화사회를 조사할 때 한국의 한 대표적인 작가도 한국전통문화의 몰락을 아쉬워하여 이를 황제를 자처하는 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나타낸 작품이 있음을 보았다. 지금에 나이 먹은 그녀로서는 제목도 생각이 안 났지만 단지 그 때 한국사회는 하나의 광인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간주했을 뿐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했다고 조사보고서를 쓴 기억은 있다.

여하튼 그의 흔적을 찾고자 배산은 이곳 에스케이에 온 것이었다. 당시 기억으로 그와는 삼십년의 나이차이가 있어서 지금 그를 만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지만 그가 완전한 소시민도 아니고 다소 공적(公的)인 활동을 하는 인물이었다고 하니 그의 자취가 혹 이 나라에 남아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의 신상에 관한 것은 그 때 사용하던 식별자(識別字:아이디)가 은하천사(銀河天使)라는 것뿐이었다. 이름은 들은 것 같았지만 이후 오십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에 매진해오며 잊어버렸고 주소도 정확한 나이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아이디 은하천사가 이미 게임에서 사용되는 이름이라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것이었다. 그 때 중국에도 당신의 아이디와 같은 이름의 게임이 있다고 하니 그는 답하기를 자기의 은하천사 별명은 소설제목으로서 더 먼저 만들어졌다고 했다.

석 달 전 에스케이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은 배산은 자신이 근무했던 국가정보국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중국의 백도(百度)를 비롯한 통신망에 접속한 어떤 아이디라도 추적조사할 방대한 통신자료가 축적되어 있었다. 물론 일반인의 접촉은 불가능하고 배산은 국가정보국에 봉직한 자로서 은퇴 후에도 국가기밀에 보안의무를 가진 특수신분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미 변할 대로 변한 에스케이나라에 관해서 중국 내에서도 근방의 너무도 이질적인 이 나라를 어떻게 취급할까 논의가 한창이었다. 이미 연()이 끊어진 나라이니 미련을 버리고 미국과 유럽세력에 완전히 넘겨 그들로부터 반대급부를 취하며 차라리 건너편의 일본하고 친교를 강화하는 것이 낫다는 현실파가 있었고 우리 중국이 과거의 몽고족 거란족 여진족 티벳족 위구르족 등을 병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문화가 우리와 유사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니만큼 에스케이나라도 국제전략의 요충지로서 소수민족병합의 전략을 시도함이 어떻겠냐는 진보파가 있었다.

이런 중에 에스케이나라에서 활동했던 과거 문화인사의 행적을 조사하겠다는 배산의 제안은 국가정보국 책임자까지도 지원을 허가하게 했다. 그리하여 2008년 은하천사 아이디로 중국의 인터넷에 접속했던 자의 한국 내 활동 위치추적 자료를 뽑아주었다. 인터넷에 유선접속한 지점을 수집(蒐集)하기도 했지만 해당아이디에 연동(連動)했던 휴대전화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더욱 풍부한 정보가 얻어졌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 한 시간 쯤 떨어진 곳에 자기의 집이 있었고 서울을 종종 오갔지만 방문 장소가 일정하지는 않았다. 일정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 외에 그가 자주 오간 곳이 있었다. 근교이긴 하나 거주지에서는 두 시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그의 집은 아파트였다니 지금 그의 흔적이 있기 만무하다. 그가 자주 방문했던 그곳을 탐사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지도상에는 특별한 표시가 있지 않고 단지 한 시골마을에서 대로변의 지역으로 표시될 뿐이었지만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독립된 건물이었으니 무언가 단서가 남아있을 듯했다.

생각 중에 버스는 서울에 들어왔다. 그 전에도 간간이 이 나라의 정황을 설명하던 안내자는 이제 서울에 관한 안내를 시작했다.

서울은 본래 한성(漢城)이라고 하여 우리나라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중화문화의 융성지역이었지만 21세기초 만주족출신의 시장이 명칭을 쇼우얼(首尔)로 바꿔서 우리나라 동북의 하얼빈(哈尔滨) 치치하얼(齊齊哈尔) 등의 변방 도시와 비슷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울은 역사적으로 중화문화의 지역을 벗어나 만주족의 땅으로 변했다. 그러나 변방유목민의 문화가 도시를 다스리는 문화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중화문화를 몰아낸 자리는 서양문화가 점유하여 거리의 간판이 모두 알파벳으로 바뀐 지도 수십년이 된다고 한다.

관광단은 지정된 호텔로 들어왔다. 단체 저녁식사 후 배산은 독방을 신청하여 저녁의 외출을 하지 않고 들어와 앉았다.

호텔방 컴퓨터를 접속하여 지도를 불러내 아이디 은하천사의 서울 남쪽 주된 방문지의 좌표정보를 입력해 보았다.

북위 37.27 동경 127.4.

해당지역의 영상을 보니 소나무와 잡초가 무성한 중에 폐허가 된 단층 혹은 복층의 세 건물이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관광단이 다시 안내원을 따라 관광지로 출발을 하는데 배산은 숙소에 남아있겠다고 청했다. 혼자 남은 배산은 이곳에 유학생자격으로 온 정보국 견습요원과 약속시간에 호텔 앞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배산은 호텔의 앞문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사양(仕樣)의 차가 택시승차장으로 들어왔다. 배산은 확인하고 승차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안경쓴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이는 견습요원은 대선배인 배산에게 정중히 물었다. 국가정보국에서 에스케이사정에 밝은 조선족출신 견습요원을 연결시켜주었으니 서비스는 믿을만한 것이었다.

이 좌표로 데려다 줘요.”

배산은 위도와 경도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색다른 행선지표시에 갸우뚱하던 운전자는 차내 도로장치(導路裝置)를 살펴보다가 좌표추적메뉴를 찾아내 설정하고는 출발했다. 차는 이내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좌표로 지정된 곳은 고속도로출구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찾아가기는 쉬웠다. 고속도로를 나와서 그 지점 쪽으로 조금 더 가보니 대로 옆에 움푹 분지로 파인 마을이 있었다.

저 곳일까요?” 운전자가 물었다,

몰라요. 정해진 좌표지점으로만 데려다주세요.”

차가 샛길로 내려가 보니 이내 좌표를 지나왔던 것이었다.

저쪽 오르막길 위로군요.” 운전자는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올라가서 목표점의 좌표에 정확히 차를 세우니 주위에는 소나무 아래 잡초가 우거진 중에 건물들이 있었다.

배산이 이곳을 둘러보는 듯하자 어디선가 나타난 관리인으로 보이는 육십대쯤의 남자가 다가왔다.

땅 좀 보시러 왔습니까?”

정갈한 옷차림의 노파가 폐허의 집터를 둘러보고 있으니 관리인은 그렇게 간주하는 것이었다.

이곳이 무엇을 했던 곳인지 알고 싶어서요.”

배산은 한국말을 할 줄 알았지만 억양이 부자연스러워 관리인은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복부인이라면 언변이 좋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어눌한 노파와 어떻게 거래상담을 할 것인가.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었던 운전자가 나섰다.

이분은 중국에서 온 분입니다. 자세한 상담은 저를 통해 전달해주십시오.”

그런가요. 하지만 난 이 땅에서 전에 뭐했는지는 모르겠고땅 사려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지시만 받아두고 있네요.”

일단 이곳을 살펴볼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운전자는 오면서 배산과 간간히 나눈 몇 마디로 그녀의 일을 짐작했다.

그러면 알겠소.”

관리인은 명함을 건네고 집터에서 내려가 사라졌다.

집터좌표의 정확한 중앙지점에서 올려보니 주위에 세 건물이 있었다. 왼쪽은 기다란 이층 건물이 있고 오른쪽 아래에도 이층 건물이 있었다. 맞은편 높은 곳에는 단층건물이 있는데 높은 곳에 있어서 오히려 이곳의 주건물 같았다. 하지만 쇠락의 정도는 가장 두드러져서 앞이 훤히 뚫려 있었다. 아마도 유리로 벽이 있었는데 깨어진 듯했다. 조금 올라가보니 그 건물 앞은 지당(池塘)이 있었던 듯 땅이 움푹 꺼져 있었다.

과연 깨진 유리창의 흔적을 지나 그대로 건물마루에 들어갈 수 있었다. 타원형의 큰 탁자가 있고 의자들이 둘러있었지만 근래 아무도 앉아보지 않은 듯 먼지와 나뭇잎이 마루바닥과 탁자 의자 곳곳에 균일하게 쌓여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아시나요.” 배산이 묻자

글쎄요. 저도 좌표만 따라왔지 어떤 곳 인지는 모르는데요.”

책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니 지식인이나 작가의 서재인 것 같고 여기 딸린 집터도 넓은 것을 보면 과거에 유력한 인사의 집이었던 것 같은데 왜 이지경이 되어 있는지 이상하네요.”

운전자는 낸들 알겠느냐는 표정을 하다가는 서재를 더 둘러보고 나서 약간 짐작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주인은 글을 쓴다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다만 21세기 중반 되어서 그러한 직업은 에스케이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여기 쌓여있는 책이라는 물건은 용도가 없어요. 수거해봤자 처리비도 안 빠지니 모두들 관심을 두지 않고 있죠.”

그래도 쓸모가 있을 건데

배산은 벽과 바닥에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알고 있는 저자의 저서들도 있었다. 국가정보국에서는 한국의 여러 정보들 중에 특히 한국의 소설을 중점적으로 관리했다. 한나라의 백성을 바꾸려면 그 나라의 소설을 바꿔야 한다는 본국출신 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말대로 한국 즉 에스케이나라의 소설은 한국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어서 중요한 정보였다.

이 나라에서 글쓰기가 단절된 과정을 배산이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21세기 초부터 이 나라는 문화의 국가적 특화가 되어 있어서 팝송과 영화만을 생산하고 문학은 생산하지 않게 되었다.

공용어가 영어인 만큼 간혹 나타나는 문학지망생들은 영어로 작품을 쓰려고 했지만 아무리 학교에서 영어를 많이 배워도 문학작품은 생각처럼 영어로 잘 써지지가 않았다. 일상어는 여전히 한국어로 하고 있으니 영어는 어디까지나 학습의 대상이지 한국인이 의미의 전달 그 이상의 목적으로 미문(美文)을 창조할 재료는 되지 못했다. 철저한 영어교육으로 국민다수가 영어작문은 가능해졌지만 일부러 즐겨 읽을 만한 영어문장의 작성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수의 특권층 자녀들이 미국생활 등으로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해도 그들 중에 문학인의 운명을 가진 자가 포함되기는 어려웠다. 문학인은 널리 씨를 뿌려 자란 이삭 중에 나타나면 거두는 것이지 싹이 나서부터 비료를 덮어쓴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자가 사라진 한국어 어휘의 뜻은 모호해져서 한국어 문장을 책임감 있게 정확히 구사하는 자는 없어졌다. 글을 짓고 기록하는 부류 자체가 소멸에 이르게 되었다. 민중간의 대화가 되었든 유명한 공인(公人)의 대중(對衆)연설이 되었든 청자(聽者)는 대강의 정황적 의미파악으로 화자(話者)와 교의(交意)했다. 모든 중요한 발표문에는 영어문장이 정확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덧붙여졌다.

아무리 봉건국가의 상류층은 민중이 지식을 공유하기를 원치 않는다지만 이차대전 후 백년이 되도록 과연 한국은 이 방향이 저네의 이익을 가져오기에 이러한 외길을 가야만 했을까. 그것은 전쟁 후 일본이 미국과 약속한 패전국으로서의 의무인 한자폐지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니 역시 패전국 대일본제국의 일부인 한국이라도 대신에 승전국의 요구를 성실히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승전국인 미국 등 서양세력의 입장에서는 韓中日의 한자권(漢字圈)에서 韓日의 동반분리가 어렵다면 한국만이라도 한자권에서 이탈하여 일중日中의 중간에서 격리수조(隔離水槽)와 같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배산이 아는 이 나라의 문화변천에 관한 지식이었다. 지금은 이 나라 사람 아무도 책을 중시하지 않는다. 각 사람의 가정에는 영상플레이어와 녹음녹화 장치가 있을 뿐이고 책은 어쩌다 이른바 실용서 몇 권 정도가 보통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책더미의 폐허가 있어도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다. 현재 이 땅을 관리하는 자는 오직 지가(地價)의 변동과 주변 상권의 개발정도에만 관심이 있다.

배산은 손에 집히는 책마다 주워들어 표지를 살피고 어떤 책인지 펼쳐보았다. 소설 등의 문학서가 많이 있었다.

아얏.”

지나다보니 철제흉상이 쓰러져 놓여있었다. 가까이 허리를 굽혀 먼지를 닦고 얼굴을 확인하니 바로 에스케이의 마지막 작가였다는 이문열(李文烈)의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소설에 관해서 정보조사에 참여했던 배산도 사진으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이문열의 서재로구나.”

어쩐지 이곳에 쌓여있는 책들 중에 이문열의 저서가 많이 보이더라니.

다른 책은 말고 이문열의 책만을 찾아보자.”

배산은 이문열의 책을 종별(種別)로 스무 권 가량 모아보았다.

알려진 책들이 대부분이구나.”

중국과 공통된 중화문화의 미련을 그린 <황제를 위하여>도 여기서 확인되었다.

지금은 에스케이나라에 문인이 없지만 전에는 이곳에도 다수의 문인이 있었다. 이문열은 그 중 마지막 문인이었다. 물론 그의 이후에도 문인의 턱걸이수준에 도달했음직한 자들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당시에도 미미한 존재들이었으니 마지막 문인 이문열 이후 역사에 남을 만한 문인은 없었다.

그런데 이미 중국의 정보요원들에게도 알려진 이문열의 책들 중에 배산이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문열의 책이었다.

이런 책 한국아니 에스케이나라의 서점에서 새 걸로 구입할 수 있을까요.”

서점이라니요. 옛날에 있었던 그걸 얘기하시는군요. 교복문고(敎福文庫)라고 부르는 판매점 같은 것들은 있는데 영상음반과 악세사리를 판매하지요.”

그래도 이런 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데 왜 취급을 안할까요.”

이런 거 지금 여기 에스케이 사람들은 발음은 읽어도 내용은 몰라요. 너무 어렵거든요. 소용없어요.”

어쨌든 같이 와주시느라 수고했어요. 여기 더 찾아봐야 더 이상 별게 없을 테니까 이젠 돌아가죠.”

배산은 책을 집어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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