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作中篇] 사라진 民族 (上) 소설소개

2066. 유라시아 극동 한반도에 이제 대한민국은 없다. 이곳 사람들은 유연한 발음으로 저네 나라를 에스케이(사우스코리아)라고 한다. 에스케이라고 해도 자기나라를 지칭함은 다들 알 수 있고 외국인들도 알아듣는데 굳이 달리 부를 필요가 없다.

인천공항이라고 불렸던 아이씨에어포트에 중국에서 온 노인 단체관광객이 입국절차를 밟았다. 삼십명 가량의 그들은 부부 혹은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담소하며 걸어들어 왔다.

그들 중 한 노파가 두드러졌다. 출입국사무소에서 보인 신분증에 따르면 노파의 이름은 허배산(許配珊) 지역은 강소성(江蘇省) 나이는 2066년에서 출생년도 1990을 빼면 76세였다. 모자를 더한 은회색 양장이 젊은 여성처럼 정갈해 보이고 얼굴은 잘생긴 남자를 방불하는 준려(俊麗)한 윤곽이었다. 간혹 오는 길에 알게 된 여행동료와 간단한 말은 주고받아도 이내 돌아서서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꼿꼿이 혼자 걷는 것이었다.

그들을 안내하는 여행사 직원이 일행 모두를 버스에 오르도록 했다. 허배산 노파도 자리에 앉았다. 버스정원보다 인원이 적어서 뒤쪽 자리로 가서 혼자 창가에 앉을 수 있었다.

배산은 바깥의 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번길이 초행은 아닌 듯 담담하면서도 감회가 어린 듯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여행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오늘은 일단 서울을 둘러보고 저녁에 숙소에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는 우리와 가깝지만 영국 미국 인도 필리핀 그리고 아프리카 일부국가들과 함께 영어문화권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에스케이는 영어문화권의 핵심국가로서 영미(英美)와 함께 팝송문화를 주도하며 우리나라와 일본이 따라오지 못하는 세계적인 대중문화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스스로는 에스케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아직도 한국이라고 오래전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에스케이의 외교부에서는 불만을 표시하고 호칭을 바꿔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공식적으로는 에스케이로 부르기로 했지만 오랫동안의 버릇 때문에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이곳은 배산으로서도 젊을 때부터 관심을 두고 관련활동을 해온 이웃나라이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다. 지금의 중국 젊은이들은 영미권의 팝송을 들으며 가수의 국적을 살피는 경우 말고는 바로 옆의 이 나라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젊은 안내원도 상당히 생소한 나라를 소개하듯 하는 것이었다.

수년전까지도 국가정보국(國家情報局)의 공무원이었던 배산은 업무로 가끔 방문하면서 이 나라의 풍물이 급격히 변화하는 것을 보아 왔지만 그 때마다 며칠 만에 귀국해야 했기에 이 나라의 현장조사는 그리 깊이 한 적이 없었다. 사실 이웃나라의 사정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정보국요원으로서 자기나라의 당면과제가 중요했기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은퇴자로서 소일거리를 찾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에스케이나라로의 방문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 생각을 한 계기는 오래 전 2008년 이 나라의 사람과 인터넷통신망에서 대화한 기억이 근래 새삼스레 떠올랐던 때문이었다.

대학초년의 겨울방학에 배산은 인터넷 국제대화방을 사용하다가 한국의 한 중년남자에 대화를 걸었다. 한창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강할 즈음에 바다건너 이웃나라의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궁금했고 마침 문인으로 보이는 그의 글에 끌리게 되었다.

당신의 시()는 한자가 있어서 대강의 뜻을 알아볼 수 있었어요.”

배산의 말에 그 남자는 놀라운 듯 감탄사를 보내며 반가워했다.

사실 한국의 다른 문인들은 국가정책상 거의 지금 한자를 사용하지 않죠.” 그는 자기의 경우가 특별하다는 것을 고백했다.

왜 그런가요. 한국은 이천년 넘게 한문을 사용했던 나라가 아닌가요. 문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항의하지는 않나요.”

날 때부터 묶여 자란 개는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하죠. 한국은 문인등단 때부터 한글만 사용하도록 훈련시키니까 그렇게 자란 문인들은 불편할 것이 없어요.”

한글은 한국만의 문자이니까 한국을 나타내기 위해서 정부가 그렇게 강제하는 것인가 보네요.”

이웃과 다름이 나라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않죠. 중국에도 한자를 쓰지 않는 소수민족들이 있잖아요. 민족의 독립은 인류최상의 문명을 함께하는 것에 달려있지 민족문화의 개성이 아닌데 이것을 사람들한테 이해(理解)시키기가 어려워요. 한글은 조선시대에 학문을 배우지 않는 하류층을 위한 글자였지요. 지식층은 보조적으로 사용했을 뿐 주된 지식교환수단은 한자였지요. 중국에서 송나라가 망하고 몽고족이 발흥하여 중국을 지배했듯이 한국에서 근세조선이 망하고 일제를 거쳐 계층이 뒤집어지니까 한자를 사용 않던 족속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요. 중국원나라시절 몽고문자가 궁중의 문자였듯이 이제 한국에서는 한글이 공식문자이지요.”

한국은 단일민족국가 아닌가요.”

중국에도 한()나라의 백성이었던 한족과 그 이후 합류한 여러 소수민족이 있듯이 한국도 신라와 고려에서 한자문화를 이어온 정통의 한반도민족과 근세조선 들어 합류한 여진족 토착왜구 등의 소수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죠.”

한국은 중국의 한 성()만한데 왜 대한(大韓)이라고 허세를 부리냐는 친구들이 많던데요.”

중화문명의 법통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천자(天子)의 나라만이 한 글자의 국명을 쓸 수 있었지요. 그러나 청()의 쇠약이후 설립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은 한 글자 이름의 국명(國名)으로서 이를 계승한 대한민국은 정통 천자의 나라의 맥을 잇지요.”

그는 배산에게 같은 중화문화권의 후예로서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은 지금 야만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중국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고 지금도 서양세력과 서양사상의 영향으로 전통문화의 훼손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이제 한중(韓中)의 문화민족은 협력하여 서로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후에 배산이 국가정보국 요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문화사회를 조사할 때 한국의 한 대표적인 작가도 한국전통문화의 몰락을 아쉬워하여 이를 황제를 자처하는 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나타낸 작품이 있음을 보았다. 지금에 나이 먹은 그녀로서는 제목도 생각이 안 났지만 단지 그 때 한국사회는 하나의 광인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간주했을 뿐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했다고 조사보고서를 쓴 기억은 있다.

여하튼 그의 흔적을 찾고자 배산은 이곳 에스케이에 온 것이었다. 당시 기억으로 그와는 삼십년의 나이차이가 있어서 지금 그를 만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지만 그가 완전한 소시민도 아니고 다소 공적(公的)인 활동을 하는 인물이었다고 하니 그의 자취가 혹 이 나라에 남아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의 신상에 관한 것은 그 때 사용하던 식별자(識別字:아이디)가 은하천사(銀河天使)라는 것뿐이었다. 이름은 들은 것 같았지만 이후 오십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에 매진해오며 잊어버렸고 주소도 정확한 나이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아이디 은하천사가 이미 게임에서 사용되는 이름이라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것이었다. 그 때 중국에도 당신의 아이디와 같은 이름의 게임이 있다고 하니 그는 답하기를 자기의 은하천사 별명은 소설제목으로서 더 먼저 만들어졌다고 했다.

석 달 전 에스케이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은 배산은 자신이 근무했던 국가정보국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중국의 백도(百度)를 비롯한 통신망에 접속한 어떤 아이디라도 추적조사할 방대한 통신자료가 축적되어 있었다. 물론 일반인의 접촉은 불가능하고 배산은 국가정보국에 봉직한 자로서 은퇴 후에도 국가기밀에 보안의무를 가진 특수신분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미 변할 대로 변한 에스케이나라에 관해서 중국 내에서도 근방의 너무도 이질적인 이 나라를 어떻게 취급할까 논의가 한창이었다. 이미 연()이 끊어진 나라이니 미련을 버리고 미국과 유럽세력에 완전히 넘겨 그들로부터 반대급부를 취하며 차라리 건너편의 일본하고 친교를 강화하는 것이 낫다는 현실파가 있었고 우리 중국이 과거의 몽고족 거란족 여진족 티벳족 위구르족 등을 병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문화가 우리와 유사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니만큼 에스케이나라도 국제전략의 요충지로서 소수민족병합의 전략을 시도함이 어떻겠냐는 진보파가 있었다.

이런 중에 에스케이나라에서 활동했던 과거 문화인사의 행적을 조사하겠다는 배산의 제안은 국가정보국 책임자까지도 지원을 허가하게 했다. 그리하여 2008년 은하천사 아이디로 중국의 인터넷에 접속했던 자의 한국 내 활동 위치추적 자료를 뽑아주었다. 인터넷에 유선접속한 지점을 수집(蒐集)하기도 했지만 해당아이디에 연동(連動)했던 휴대전화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더욱 풍부한 정보가 얻어졌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 한 시간 쯤 떨어진 곳에 자기의 집이 있었고 서울을 종종 오갔지만 방문 장소가 일정하지는 않았다. 일정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 외에 그가 자주 오간 곳이 있었다. 근교이긴 하나 거주지에서는 두 시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그의 집은 아파트였다니 지금 그의 흔적이 있기 만무하다. 그가 자주 방문했던 그곳을 탐사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지도상에는 특별한 표시가 있지 않고 단지 한 시골마을에서 대로변의 지역으로 표시될 뿐이었지만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독립된 건물이었으니 무언가 단서가 남아있을 듯했다.

생각 중에 버스는 서울에 들어왔다. 그 전에도 간간이 이 나라의 정황을 설명하던 안내자는 이제 서울에 관한 안내를 시작했다.

서울은 본래 한성(漢城)이라고 하여 우리나라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중화문화의 융성지역이었지만 21세기초 만주족출신의 시장이 명칭을 쇼우얼(首尔)로 바꿔서 우리나라 동북의 하얼빈(哈尔滨) 치치하얼(齊齊哈尔) 등의 변방 도시와 비슷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울은 역사적으로 중화문화의 지역을 벗어나 만주족의 땅으로 변했다. 그러나 변방유목민의 문화가 도시를 다스리는 문화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중화문화를 몰아낸 자리는 서양문화가 점유하여 거리의 간판이 모두 알파벳으로 바뀐 지도 수십년이 된다고 한다.

관광단은 지정된 호텔로 들어왔다. 단체 저녁식사 후 배산은 독방을 신청하여 저녁의 외출을 하지 않고 들어와 앉았다.

호텔방 컴퓨터를 접속하여 지도를 불러내 아이디 은하천사의 서울 남쪽 주된 방문지의 좌표정보를 입력해 보았다.

북위 37.27 동경 127.4.

해당지역의 영상을 보니 소나무와 잡초가 무성한 중에 폐허가 된 단층 혹은 복층의 세 건물이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관광단이 다시 안내원을 따라 관광지로 출발을 하는데 배산은 숙소에 남아있겠다고 청했다. 혼자 남은 배산은 이곳에 유학생자격으로 온 정보국 견습요원과 약속시간에 호텔 앞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배산은 호텔의 앞문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사양(仕樣)의 차가 택시승차장으로 들어왔다. 배산은 확인하고 승차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안경쓴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이는 견습요원은 대선배인 배산에게 정중히 물었다. 국가정보국에서 에스케이사정에 밝은 조선족출신 견습요원을 연결시켜주었으니 서비스는 믿을만한 것이었다.

이 좌표로 데려다 줘요.”

배산은 위도와 경도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색다른 행선지표시에 갸우뚱하던 운전자는 차내 도로장치(導路裝置)를 살펴보다가 좌표추적메뉴를 찾아내 설정하고는 출발했다. 차는 이내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좌표로 지정된 곳은 고속도로출구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찾아가기는 쉬웠다. 고속도로를 나와서 그 지점 쪽으로 조금 더 가보니 대로 옆에 움푹 분지로 파인 마을이 있었다.

저 곳일까요?” 운전자가 물었다,

몰라요. 정해진 좌표지점으로만 데려다주세요.”

차가 샛길로 내려가 보니 이내 좌표를 지나왔던 것이었다.

저쪽 오르막길 위로군요.” 운전자는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올라가서 목표점의 좌표에 정확히 차를 세우니 주위에는 소나무 아래 잡초가 우거진 중에 건물들이 있었다.

배산이 이곳을 둘러보는 듯하자 어디선가 나타난 관리인으로 보이는 육십대쯤의 남자가 다가왔다.

땅 좀 보시러 왔습니까?”

정갈한 옷차림의 노파가 폐허의 집터를 둘러보고 있으니 관리인은 그렇게 간주하는 것이었다.

이곳이 무엇을 했던 곳인지 알고 싶어서요.”

배산은 한국말을 할 줄 알았지만 억양이 부자연스러워 관리인은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복부인이라면 언변이 좋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어눌한 노파와 어떻게 거래상담을 할 것인가.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었던 운전자가 나섰다.

이분은 중국에서 온 분입니다. 자세한 상담은 저를 통해 전달해주십시오.”

그런가요. 하지만 난 이 땅에서 전에 뭐했는지는 모르겠고땅 사려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지시만 받아두고 있네요.”

일단 이곳을 살펴볼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운전자는 오면서 배산과 간간히 나눈 몇 마디로 그녀의 일을 짐작했다.

그러면 알겠소.”

관리인은 명함을 건네고 집터에서 내려가 사라졌다.

집터좌표의 정확한 중앙지점에서 올려보니 주위에 세 건물이 있었다. 왼쪽은 기다란 이층 건물이 있고 오른쪽 아래에도 이층 건물이 있었다. 맞은편 높은 곳에는 단층건물이 있는데 높은 곳에 있어서 오히려 이곳의 주건물 같았다. 하지만 쇠락의 정도는 가장 두드러져서 앞이 훤히 뚫려 있었다. 아마도 유리로 벽이 있었는데 깨어진 듯했다. 조금 올라가보니 그 건물 앞은 지당(池塘)이 있었던 듯 땅이 움푹 꺼져 있었다.

과연 깨진 유리창의 흔적을 지나 그대로 건물마루에 들어갈 수 있었다. 타원형의 큰 탁자가 있고 의자들이 둘러있었지만 근래 아무도 앉아보지 않은 듯 먼지와 나뭇잎이 마루바닥과 탁자 의자 곳곳에 균일하게 쌓여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아시나요.” 배산이 묻자

글쎄요. 저도 좌표만 따라왔지 어떤 곳 인지는 모르는데요.”

책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니 지식인이나 작가의 서재인 것 같고 여기 딸린 집터도 넓은 것을 보면 과거에 유력한 인사의 집이었던 것 같은데 왜 이지경이 되어 있는지 이상하네요.”

운전자는 낸들 알겠느냐는 표정을 하다가는 서재를 더 둘러보고 나서 약간 짐작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주인은 글을 쓴다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다만 21세기 중반 되어서 그러한 직업은 에스케이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여기 쌓여있는 책이라는 물건은 용도가 없어요. 수거해봤자 처리비도 안 빠지니 모두들 관심을 두지 않고 있죠.”

그래도 쓸모가 있을 건데

배산은 벽과 바닥에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알고 있는 저자의 저서들도 있었다. 국가정보국에서는 한국의 여러 정보들 중에 특히 한국의 소설을 중점적으로 관리했다. 한나라의 백성을 바꾸려면 그 나라의 소설을 바꿔야 한다는 본국출신 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말대로 한국 즉 에스케이나라의 소설은 한국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어서 중요한 정보였다.

이 나라에서 글쓰기가 단절된 과정을 배산이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21세기 초부터 이 나라는 문화의 국가적 특화가 되어 있어서 팝송과 영화만을 생산하고 문학은 생산하지 않게 되었다.

공용어가 영어인 만큼 간혹 나타나는 문학지망생들은 영어로 작품을 쓰려고 했지만 아무리 학교에서 영어를 많이 배워도 문학작품은 생각처럼 영어로 잘 써지지가 않았다. 일상어는 여전히 한국어로 하고 있으니 영어는 어디까지나 학습의 대상이지 한국인이 의미의 전달 그 이상의 목적으로 미문(美文)을 창조할 재료는 되지 못했다. 철저한 영어교육으로 국민다수가 영어작문은 가능해졌지만 일부러 즐겨 읽을 만한 영어문장의 작성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수의 특권층 자녀들이 미국생활 등으로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해도 그들 중에 문학인의 운명을 가진 자가 포함되기는 어려웠다. 문학인은 널리 씨를 뿌려 자란 이삭 중에 나타나면 거두는 것이지 싹이 나서부터 비료를 덮어쓴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자가 사라진 한국어 어휘의 뜻은 모호해져서 한국어 문장을 책임감 있게 정확히 구사하는 자는 없어졌다. 글을 짓고 기록하는 부류 자체가 소멸에 이르게 되었다. 민중간의 대화가 되었든 유명한 공인(公人)의 대중(對衆)연설이 되었든 청자(聽者)는 대강의 정황적 의미파악으로 화자(話者)와 교의(交意)했다. 모든 중요한 발표문에는 영어문장이 정확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덧붙여졌다.

아무리 봉건국가의 상류층은 민중이 지식을 공유하기를 원치 않는다지만 이차대전 후 백년이 되도록 과연 한국은 이 방향이 저네의 이익을 가져오기에 이러한 외길을 가야만 했을까. 그것은 전쟁 후 일본이 미국과 약속한 패전국으로서의 의무인 한자폐지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니 역시 패전국 대일본제국의 일부인 한국이라도 대신에 승전국의 요구를 성실히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승전국인 미국 등 서양세력의 입장에서는 韓中日의 한자권(漢字圈)에서 韓日의 동반분리가 어렵다면 한국만이라도 한자권에서 이탈하여 일중日中의 중간에서 격리수조(隔離水槽)와 같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배산이 아는 이 나라의 문화변천에 관한 지식이었다. 지금은 이 나라 사람 아무도 책을 중시하지 않는다. 각 사람의 가정에는 영상플레이어와 녹음녹화 장치가 있을 뿐이고 책은 어쩌다 이른바 실용서 몇 권 정도가 보통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책더미의 폐허가 있어도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다. 현재 이 땅을 관리하는 자는 오직 지가(地價)의 변동과 주변 상권의 개발정도에만 관심이 있다.

배산은 손에 집히는 책마다 주워들어 표지를 살피고 어떤 책인지 펼쳐보았다. 소설 등의 문학서가 많이 있었다.

아얏.”

지나다보니 철제흉상이 쓰러져 놓여있었다. 가까이 허리를 굽혀 먼지를 닦고 얼굴을 확인하니 바로 에스케이의 마지막 작가였다는 이문열(李文烈)의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소설에 관해서 정보조사에 참여했던 배산도 사진으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이문열의 서재로구나.”

어쩐지 이곳에 쌓여있는 책들 중에 이문열의 저서가 많이 보이더라니.

다른 책은 말고 이문열의 책만을 찾아보자.”

배산은 이문열의 책을 종별(種別)로 스무 권 가량 모아보았다.

알려진 책들이 대부분이구나.”

중국과 공통된 중화문화의 미련을 그린 <황제를 위하여>도 여기서 확인되었다.

지금은 에스케이나라에 문인이 없지만 전에는 이곳에도 다수의 문인이 있었다. 이문열은 그 중 마지막 문인이었다. 물론 그의 이후에도 문인의 턱걸이수준에 도달했음직한 자들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당시에도 미미한 존재들이었으니 마지막 문인 이문열 이후 역사에 남을 만한 문인은 없었다.

그런데 이미 중국의 정보요원들에게도 알려진 이문열의 책들 중에 배산이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문열의 책이었다.

이런 책 한국아니 에스케이나라의 서점에서 새 걸로 구입할 수 있을까요.”

서점이라니요. 옛날에 있었던 그걸 얘기하시는군요. 교복문고(敎福文庫)라고 부르는 판매점 같은 것들은 있는데 영상음반과 악세사리를 판매하지요.”

그래도 이런 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데 왜 취급을 안할까요.”

이런 거 지금 여기 에스케이 사람들은 발음은 읽어도 내용은 몰라요. 너무 어렵거든요. 소용없어요.”

어쨌든 같이 와주시느라 수고했어요. 여기 더 찾아봐야 더 이상 별게 없을 테니까 이젠 돌아가죠.”

배산은 책을 집어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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